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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탄 재활의학 전문의 유종윤 동문
조회 2503 2016-02-17 11:40:11

“무한대는 반으로 나눠도 무한대다. 멀쩡한 몸으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한대라면, 절반인 몸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무한대다.” 미국의 장애인 운동가이자 40여 개국을 누빈 ‘휠체어 여행가’인 스콧 레인즈 박사의 말이다. 그는 하반신 마비를 얻은 후 자신에게 닥친 ‘커다란 변화’를 삶을 바꿔줄 ‘기회’로 만든 많은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불의의 사고로 인생이 역전되는 상황 속에서 휘청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로잡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와중에 사고 후 자신의 직업을 말 그대로 ‘천직’으로 만든 이가 있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바로 서울아산병원 재활의학과 의사 유종윤(의학 88년 졸) 동문. 유 동문의 극적인 ‘인간 승리’와 그로 인해 더 깊어진 ‘천직’에 대한 열정 속으로 들어가 보자.

휠체어 타고 나타난 재활 환자들의 희망의 등불

비 오는 날 출근길, 그가 운전하던 차가 낭떠러지로 굴렀다. 커브길 이었다는 것만 기억날 정도로 상황은 급박했다. 정신을 차려 깨어보니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척추가 다쳤음을 직감했다. 운명의 장난이 아닐까 싶었다. 자신이 의사로 근무하던 병원에 환자로 실려 왔다니 말이다. 게다가 그가 치료했던 환자들처럼 척추가 손상됐다는 사실은 유 동문을 더욱 기막히게 했다. 그는 재활치료의 당사자가 되면서 의사로서 알지 못했던 환자들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내가 치료하던 환자들과 같이 치료 받으려니 민망하대요.(웃음) 솔직히 그동안 내가 환자들 치료하면서도 재활치료 자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 많이 들었죠. 그런데 직접해보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처음엔 내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줄 몰랐습니다. 재활치료를 행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이 각각 되어보니 그제야 알겠더군요. 비로소 환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으니까요.”

환자들의 마음을 그들의 시선에서 이보다 더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의사가 있을까. 유 동문은 환자들에게 의사인 동시에 같은 역경을 극복해낸 인간승리의 모델이었다. 그는 온종일 휠체어를 탄 채 진료하고 회진을 돌며 환자들이 희망의 빛을 꺼뜨리지 않도록 도왔다. 환자들은 힘든 재활치료를 받으며 낙심하며 괴로워했고, 때로는 보호자들과의 마찰을 자주 일으켰다. 유 동문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환자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진심을 다해 그들에게 충고했다.

“환자들이 힘든 운동치료를 게을리 하거나 처지를 비관할 때는 ‘나보다 상태가 더 좋은데 왜 우울해하느냐’고 야단도 쳐요. 내가 그렇게 말하는 자체가 그들에게 자극이 되겠죠.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 과거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현재의 자신을 믿으라고 말해요. 아프다고 해서 보호자에게 신경질내기 보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건네라고 권유합니다. 보호자에게는 ‘당신 눈앞에 누워 있는 환자는 새로 탄생한 아기’라고 말하죠. 당신의 지극한 정성과 보살핌이 있어야 앞으로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으니 끝까지 이끌어 달라고 당부하는 거예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시기니까요.”

의술을 넘어 인술을 행하는 의사, “새 삶을 시작하는 마음으로”

병을 치료하는 의술을 넘어 마음을 치료하는 인술까지 행하는 유 동문에겐 처음부터 재활의학이 천직이었음이 틀림없다. 82학번으로 본교 의대에 입학한 그가 “수술 실습에 들어가면 졸렸다”고 말했을 만큼 다른 분야는 적성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환자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찾는 재활의학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했다. 만약 그가 외과의사가 됐다면 사고 후 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니 그야말로 천직이 따로 없다. 하지만 아무리 천직이라도 스스로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없이 삶을 놓아버렸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펠로우였죠. 펠로우는 인턴, 레지던트 후 분과 전문의 자격을 얻기 위한 계약직 단계예요. 오랜 시간 달려온 고지를 눈앞에 두고 이대로 주저앉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싶었습니다. ‘나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척추수술은 6개월 내지 1년 정도 휴식이 필요한데, 난 2개월 치료 후 무조건 병원으로 출근했죠.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밥 한 그릇을 놓고 씨름하다가 그릇을 엎기 일쑤였고, 손놀림이 어둔해 처음 몇 달 동안은 진료차트를 쓸 수조차 없었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유 동문의 모습이 인생이 뒤바뀔 만큼 큰 사고를 당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심지어 그의 아내는 “왜 한번도 울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런 물음에 “울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그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 자신을 괴로움 속에 살게 하는 것보다 앞으로의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고 그에 맞춰 노력해 가는 것이 건설적이라는 것이다.

“마음처럼 쉽진 않지만, 하루하루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해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에 앞서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중요하죠. 나도 처음부터 내 모습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아니에요.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하상배 교수님(작고)이 많은 힘이 돼주셨습니다. 한국 재활의학의 기초를 다진 분이예요. 전공공부와 재활치료를 계속하며 쓰러져가는 삶의 기둥을 세울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죠.”

“장애인의 다친 마음 보듬어 안는 투자와 기부, 배려 필요”

재기한 의사로서 재활치료와 함께 하는 동안, 그는 치료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퇴원하는 환자들을 종종 봐왔다. 좀 더 입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더욱 안타까웠다. 환자들은 다른 병과는 달리 완치되지 못한 채 장애를 갖고 퇴원한다. 유 동문은 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몸으로 느꼈다. 이에 그는 장애 환자들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변인이 됐다.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정책이 실현돼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안도 내놓았다.

“재활의학은 물리치료사 등의 인건비가 많이 들어 병원 입장에서 수익이 나지 않는 분야죠. 재활의료기기 등이 다 갖춰진 곳은 몇 군데 없어요. 게다가 응급환자들을 받아야 하는 상황 이라 재활치료 환자들이 약 한달 후 퇴원을 강요받는 입장이 됩니다. 이는 국민소득이 높아져서 자연스럽게 장애 복지에 대한 투자와 기부가 늘어나면 차차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 전에 일단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죠. 많은 관심이 몰린 곳은 외면당하지 않으니까요. 퇴원한 환자들이 갈 곳이 없으니, 가장 시급한 것은 치료시설이 다 갖춰지고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재활복지 시설이겠죠. 하지만 이런 혜택들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전동휠체어도 필요 없는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데, 그런 부작용이 생기면 안 되죠.”

재활치료를 위한 정책이 개선되기 전에 “장애인들을 진정으로 돕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이라고 그는 말한다. 장애인은 사회에서 한 편으로 밀려나 있는 소외된 자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닿지 않을 만큼 멀어진 존재가 됐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마음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이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연결해주는 통로에 유 동문이 서있다. 그는 “장애인의 불편함을 느끼게 되면 주저 없이 도우라”고 충고했다. 필요한 것이 있어도 미안함에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을 유 동문은 이해하는 것이다.

“외출하려고 시도하다가 불편함에 화가 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도 나는 이 정도 직책을 가지고 있으니 선택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경우에요. 그렇지 못한 장애인들이 훨씬 많아요. 데모하는 장애인들을 보세요. 처음엔 나도 잘 이해가지 않았지만 ‘만약 내가 저 상황에 처했다면’에 생각이 미치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장애인들을 위한 작은 배려들이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고 해결해주려 하지 않으니 폭발할 수밖에요. 그들은 해결방법이 없어서 거리로 나온거에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용기로 소신 있게 도전하라”

이렇게 그는 재활의학과 장애복지에 대해 그 누구보다 강한 소신과 확고한 목표를 가졌음에도, 자꾸만 “나는 별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발휘할 뿐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지향점에 따라 가야할 길을 마련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자체가 거창하다”고 일축한다. 단지 자기 할일을 소신 있게 마무리 짓는 것이 중요하단다. 그 역시도 그런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며 한양인들에게 ‘소신있게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라’고 당부했다.

“수입에 의해 직업을 결정하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 돈에 의해 좌지우지하게 되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길 바랍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면 적극적으로 도전하세요. 내가 봐온 바로는 한양인들이 일도 곧잘 해내고 실력도 좋다고 칭찬받곤 해요. 하지만 이런 배경만 믿고 실력을 키우는데 소홀히 하면 한양인이 아니라 한양인 사돈 내 팔촌이라도 채용하지 않는 게 당연하죠.”

유 동문은 한양인의 선배로서 더 많은 후배들이 각 분야에서 자리를 빛내주기를 바랐다. 진료를 마치러 바쁘게 돌아가는 속에서도 그는 오토바이를 즐겨 탄다는 사진기자에게 “조심하라”는 후배를 위한 따뜻한 말을 잊지 않았다. 헤어짐의 인사를 나눈 지 한참 지났는데도, 그의 휠체어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없어 엘리베이터 몇 대를 그냥 보내야만 했다.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리게 하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기자도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탔던 엘리베이터였다. “고의가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우리들의 작은 관심이 재활치료와 장애복지에 대한 소외와 외면을 해결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되길 바랐다.


글 : 한소라 취재팀장 kubjil@hanyang.ac.kr
사진 : 전상준 학생기자 ycallme@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유 동문은 88년 본교 의대를 졸업했다. 90년부터 4년간 서울중앙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전공의, 그 후 5년간 서울아산병원에서 전임의로 근무했다. 99년부터 전임강사를 맡은 후 2001년 조교수로 임명됐다. 유 동문은 ‘3-D 동작분석기를 이용한 노인과 젊은 성인의 보행과 일상생활 동작 비교’ 연구 발표를 비롯해 총 4편의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95년 출근길에 빗길에 차가 전복되어 가슴아래가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지만 재활치료와 전공공부를 계속해 교수로 임용됐다. 하반신 마비의 중증장애인 환자이면서 의사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술을 펼치고 있다.

2007-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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