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외출은 누군가에겐 아주 특별한 일상이 된다. 청계산, 대모산, 인왕산, 관악산 등 서울 내의 산들뿐만 아니라 남한산성 외곽길, 포천 산정호수, 제천 청풍명월, 남이섬 등 먼 곳까지.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으로 시각장애인들의 특별한 외출에 동행하는 ‘한양 아동산회’를 이끄는 안희창 교수(의대·의학). 한양 아동산회는 하상 장애인 복지관의 ‘아름다운 동행 산우회(약칭: 아동산회)’에 참여하는 한양대학교 병원 직원들의 모임이다. 아름다운 동행 산우회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설립된 하상 장애인 복지관에서 10여년 전 처음 시작된 시각장애인 산행 프로그램. 총 100차례 이상, 매 산행마다 100명 이상의 인원이 참가할 정도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 그들의 특별한 외출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서울 근교의 산 혹은 시각장애인들이 걷기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1년 중 가장 날씨가 좋은 5월과 10월에는 서울에서 좀 더 먼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산행지 인근 지하철역에 모여 시각장애인 1명, 봉사자 1명이 짝을 이룬다. 파트너끼리는 하루 동안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평탄한 길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봉사자들의 팔을 가볍게 끼고 걷고, 좁고 험한 구간에서는 시각장애인이 봉사자의 어깨를 잡거나, 끈으로 서로를 연결해 통과한다. 봉사자들은 길을 안내하며 장애물을 알려주고, 주변의 풍경을 설명한다. “꽃 향기도 맡아보게 하고, 잎사귀도 만져보게 하죠. 소리나 냄새는 이 분들이 먼저 감지해요. 더 민감하거든요.” 시각장애인들에게 산행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지내는 시각장애인들은 다른 신체장애가 겹치거나 평상시 운동 부족으로 인해 걷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처음 나오는 이들에게는 산행이 쉽지 않지만, 꾸준히 산행을 하며 다리가 튼튼해지고 각종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된다. 또 모처럼의 야외활동을 통해 기분전환을 할 수 있어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
시각장애인들 중에서는 선천적인 경우보다 망막 병변 같은 안구 질환이나 사고 등 후천적인 경우가 더 많다. 후천적 시각장애인들은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훨씬 힘든 시간을 겪는다. 상실감 때문이다. “부부가 두 분 다 시각장애인인 경우가 있었어요. 남편분은 월남전에서 눈이 완전 실명되고 두 팔을 잃었는데 너무 힘드니까 울분을 갖고 계셨어요. 부인분은 굉장히 감수성이 풍부하셔서 시를 쓰셨죠. 시력을 잃기 전 파일럿이었던 분도 있어요. 생업마저 잃게 된 안타까운 경우죠.” 마음의 상처를 가진 시각장애인들에게, 대화와 교감은 그 자체로 치유다. 어떤 주제의 이야기가 오고가냐는 질문에 안 교수는 “주제에 구애 받지 않는다”며 “시각장애인분들 중에는 지리산 노고단에 다녀 왔을 정도로 활동적인 분도 계세요. 각각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대화 주제도 다양하죠. 나이가 많은 사람들끼리는 자녀 키우는 이야기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해요.”라고 답했다. 약 3시간 여의 산행이 끝난 후엔 다같이 저녁 식사를 한다. 식사 동안 수발, 식당을 나설 때 신발 신는 것도 돕는다. 헤어질 때 지하철역으로 안내하는 것까지 봉사자들의 몫이다.
안 교수가 아동산회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선배의 권유를 통해서다. 시각장애인들과의 산행에서 보람을 느낀 안 교수는 ‘나만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다른 의사, 간호사들과 함께 하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처음엔 병원 야유회를 대신해 직원들과 함께 참여했는데, 다른 직원들도 저처럼 느끼게 된 거죠.”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직원들이 점점 늘어나 2011년에는 병원으로부터 정식 동호회로 인가 받았다. 현재 ‘한양 아동산회’의 회원은 한양대학교 병원의 의사, 간호사, 레지던트 등 총 90여명 정도로, 매회 25명 정도가 산행에 참여하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을 데려오기도 하고, 지난 달에는 의과대학 본과 학생 4명도 산행에 참여했다. “시각장애인분들에게 한양 아동산회의 인기가 최고에요. 인턴, 레지던트 등 젊은 사람들이 친절하고, 든든하기 때문이죠.”
발 맞춰 걸으며 실천하는 사랑
한양대 병원의 총 병동을 맡고 있는 박미라 간호팀장(간호.81) 역시 4년 전부터 아름다운 동행에 참여하고 있다. 박 팀장은 안 교수를 통해 ‘아동산회’를 알게 됐다. 학부시절부터 의료 봉사활동의 경험이 꽤 있었지만, 시각장애인과 산행을 하는 봉사는 생소했다. “가을에 우연히 기회가 생겨 가게 됐어요. 어두운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실제로 가서 보니까 밝고 순수했어요. 우리가 생각했을 때 시각장애인들은 외모에 신경을 안 쓸 것 같은데, 외모에도 신경을 많이 쓰세요. ‘저 지금 어때요?’라고 물어보기도 하시고요.” 현재는 매달 정기산행을 안내하는 프린트물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열성적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간호국의 수간호사를 비롯한 많은 인원이 아동산회에 참여하게 됐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도 자발적으로 산행에 따라오기도 했다.
병원에서 일한 지 30년 째. 평생을 행당산에서 보냈다. 환자를 대하는 일은 늘 어려웠다. 간호사는 가족을 제외하고 환자가 가장 가까이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되더라도, 더 힘든 환자들을 우선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입장. 아동산회는 그녀에게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됐다. “시각장애인들을 가까이서 보며 내가 건강하기 때문에 간과했던 환자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한양대 공대 출신으로 시각을 잃고 3년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분도 계셨어요. 저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더라구요.” 누구에게나 앞 일은 장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시각장애인들과의 경험을 통해, 환자들을 대할 때의 거리도 많이 좁혀지게 된 것. 의료인은 환자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박 팀장의 생각이다. “도와주러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얻는 게 훨씬 많으니”라며 “간호사는 다른 직종보다 더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직종이에요. 내가 힘들거나 짜증이 나면 절대 환자들을 수용하지 못해요.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많이 지치는데, 아동산회를 통해 소진된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 교수 역시 아동산회를 시작한 후 스스로에게 많은 변화가 찾아온 것을 느꼈다. “더 겸손해졌어요. 제 자신을 낮추게 됐고, 진료할 때도 환자들을 더 배려하게 됐죠. 무엇보다 시각장애인분들이 힘든 조건 속에서도 작은 일상을 감사히 여기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기게 됐어요” 안 교수는 의학과 74학번으로 학부, 대학원까지 모두 우리대학을 거친 ‘한양인’. 흰 가운을 입은 지 34년째. 국내의 미세 조직 재건 수술, 선천성 기형 교정 수술 분야에서 손꼽히는 실력으로, 다문화 가정의 자녀의 구순열 수술 등 의료활동을 통해서도 사랑의 실천을 꾸준히 행해왔다. “우리 학교의 ‘사랑의 실천’은 최고의 교훈이라고 생각해요. 1974년도 입학식에서 김연준 당시 총장님이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실 땐 별로 공감이 안 갔어요. 근면, 성실, 정직 같은 것들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던 시대였거든요.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사랑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때 본인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함께 느끼기를 바랍니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서로 발 맞춰 걷는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환해진다. 혼자가 아닌 함께라 더 행복한 그들이다.
- 박지현 학생기자
- saturn10@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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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요진 사진기자
- loadingman@hanyang.ac.kr
2014-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