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미래가 온다>의 저자인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미래 사회에서 필요한 두 가지 역량을 뽑았다. ‘하이 콘셉트(High Concept)’와 ‘하이 터치(High Touch)’다. 하이콘셉트는 관련이 없는 요소를 엮어 새롭게 의미화 하는 일, 하이 터치는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공감을 이끌어 내는 일을 뜻한다. '융합'과 '소통'이다. 정지훈 동문(의학.90)은 두 가지 요소를 완벽히 소화했다. 의대를 졸업한 보건의료 분야 전문가이자, 30년 경력의 프로그래머. 컴퓨터에 관한 고집스러운 관심을 바탕으로, '의료'와 'IT'의 융합에 앞장섰다.
판매용 컴퓨터를 제 것처럼 쓰던 소년
정 동문은 스스로를 '호기심 많은 소년'으로 회상했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 과학, 음악, 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책을 읽었어요. 호기심이 많았거든요. 한번 풀었던 문제는 다시 보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것을 좋아했죠." 이런 그가 '최신' 기술인 컴퓨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초등학교 때 단기 컴퓨터 기초 교육을 받은 것이 시발점이 됐다. 하지만 그 시절 보통의 가정이 그랬듯 정 동문의 집에는 컴퓨터가 없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백화점에 진열된 컴퓨터'다. "게임을 만들고 싶었어요. 집에서 코드를 쓰고는, 학교가 끝나면 백화점에 올라가 진열된 컴퓨터에 코드를 올렸죠. 어렸으니 망정이지, 무모하고 염치 없는 생각이죠(웃음)." 진열용 제품은 하드디스크가 없어 저장이 불가능했다. 매일 처음부터 코드를 다시 쓰는 일을, 어린 그는 지치지도 않고 해냈다.
중학교 때도 컴퓨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부잣집 친구네를 노렸다. "친구네에서 애플 컴퓨터를 샀더라고요. 컴퓨터를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친구네 집에서 컴퓨터를 다루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은 현관이 열렸는데 집에는 사람이 없어서, 친구 방에 들어가 프로그래밍을 했어요." 친구네를 제 집처럼 드나드니, 그 집에서 가족 대접을 받는 지경이 됐다. 부모님의 지인들이 있을 때도 아들처럼 반겨줄 정도였단다. 정 동문은 꾸준히 자신의 관심 분야를 파고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그래밍 대중서를 쓴 분이 중학교 3학년 때 기술 선생님이에요. 이론서를 실제로 적용해 보고자 동기 및 선배들과 공부를 시작했죠." 정 동문이 우리나라 최초의 컴퓨터 잡지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 기고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쳇바퀴 도는 의대 생활, 새로운 길을 찾아서
컴퓨터 인재로 성장한 정지훈 동문은 예상 외로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성적이 좋은 편이었는데, 전기 모집에 떨어졌어요. 후기 모집이 가능한 대학이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이었죠."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를 골랐지만, 대학 생활이 지겹지는 않았단다. "입학 후에도 컴퓨터 관련 전공 교재를 독학했어요. PC 통신 동아리에도 가입했고, 학부 시절 아케이드 게임도 개발하고 그랬죠." 그러나 의과대학 생활이 그토록 만만할 리는 없다. 고민이 커졌다. "붕어빵 틀에서 나오는 빵 중에 하나가 된 것 같았죠. 의사 사회 바깥의 것들을 보지 못하고, 틀에 박힌 생각만 하게 되거든요. 좌충우돌하는 삶을 원했는데, 의사가 되면 그런 생활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 동문은 평범한 의사로서의 길 대신,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마음 먹는다.
그가 자신의 길을 확신한 때는 대체 복무를 위해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보건소에서 컴퓨터 운영 체계를 도입하던 시기였어요. 컴퓨터에 능통한 의사가 필요했죠. 덕분에 컴퓨터를 다시 공부할 기회도 얻었고요."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해당 보직에 지원했다는 정 동문. 예방의학교실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보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의학과는 달리 사회학적 접근이 필요한 분야다. "의학 지식을 사회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어요. 전역 이후 인턴 생활을 마치고, 완전히 메스를 내려놓았죠." 정 동문은 본격적으로 '융합 학자'의 길을 걷는다. 서울대학교에서 보건정책관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의공학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올라 박사 학위까지 마쳤다.
의료와 IT의 융합, 새로운 사례를 쓰다
정지훈 동문은 지난 2007년 귀국 후 우리들병원 생명과학기술연구소장을 거쳐, 2010년 관동의대 명지병원 융합IT연구소장을 지냈다. 이 곳에서 정 동문은 새로운 의료 서비스를 제안했다. 'QR코드'를 활용해 환자가 의료 정보를 간편하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한 것. 관동의대 명지병원의 130여개 방에는 하나 같이 QR코드가 부착돼 있다. 이를 통해 스마트폰으로 의료진의 프로필을 확인 가능하고, 앞으로 진행될 검사의 종류와 방법도 즉석에서 열람할 수 있다. "억 단위를 투자해 거창한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의료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적은 비용으로도 의사와 환자가 편의를 누리는 서비스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죠." 이 정책에는 '융합'과 '소통'을 지향하는 정 동문의 철학이 반영돼 있다.
정 동문에게 융합은 '수단'이다. "융합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어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게 중요하죠. 해결책으로 제안하는 게 '융합'이에요. 기술 간의 협업이 중요해지고, 각 기술의 전문 역량이 요구되는 상황이 오는 거죠." 정 동문의 목표는 환자와의 '소통'이었다. 환자의 후기를 수집, 분석하는 '환자공감센터' 설립을 주도했다. 퇴원 환자를 대상으로 병원의 전 분야에 대한 후기를 수집했다. 의료진과의 의사소통, 진료비, 시설, 행정 등 병원의 모든 서비스가 평가 대상이 됐다. 수집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환자 중심의 의료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눈을 넓히고 발을 뻗을 것”
정지훈 동문은 보건복지부, 지식경제부, 교육과학기술부 등에서 IT정책 자문으로 활동한 바 있는 탁월한 IT전문가다. 현재는 경희사이버대학교 모바일융합학과 교수로 재직 중. 정 동문은 "끊임 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라"고 조언했다. "전공에서 배운 이론을 다양한 층위에서 분석하는 게 중요해요. 이론이 등장한 사회적, 정치적, 과학적 배경에 대해서 고민해 보세요. 이공계 학생이라면 사회와의 접목에, 인문계 학생이라면 과학과의 접목에 관심을 가져보는 거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 자신의 능력을 찾으면, 사회를 위해 해야할 일도 보인단다. "정말로 원하는 일이라면 '틀렸다'는 목소리에 좌우되지 마세요. 원하는 일을 꾸준히 하려면 사회를 넓은 시야로 해석해야 해요.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것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의 접점을 찾으세요."
마지막으로 정 동문은 '성공의 기억을 쌓으라'고 조언했다. "생각으로만 남기지 말고, 기록으로 남기세요. 작은 프로젝트를 하나씩 완결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커다란 꿈은 수없이 많은 작은 꿈들의 연속 선상에 있는 거예요." 당장에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진 정지훈 동문. 왕성한 호기심만은 소년의 모습 그대로다.
학력 및 약력
정지훈 동문(의학.90)은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보건정책관리학 석사학위를, 서던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의용생명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우리들병원에서 생명과학기술연구소장을 지냈으며, 관동의대 명지병원 융합IT연구소장을 거쳐 경희사이버대학교 모바일융합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보건복지부, 지식경제부, 교육과학기술부 등에서 IT 정책 자문으로 활약한 바 있다. 다양한 매체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하루 방문자 2,000명 이상의 블로그 ‘하이컨셉 & 하이터치(http://health20.kr)의 운영자다. <거의 모든 IT의 역사>, <제4의 불> 등을 펴낸 탁월한 IT 전문가다.
- 곽민해 취재팀장
- cosmos3rd@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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