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영역인 ‘의학’. 그만큼 어렵다. 사람을 살릴 수도, 위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의학지식이다. 언론은 정확성과 엄밀성을 기해 관련 내용을 보도한다. 게다가 일반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가지를 담당하는 사람이 바로 ‘의학전문기자’다. 조동찬 동문(의학.94)은 SBS 의학전문기자다. 의과대학 졸업 후 10년간 ‘사람을 살리는 의사’였던 조 동문. 지금은 ‘사람을 살리는 기자’로 일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공부 잘하는 학생, 진찰 잘하는 의사
조동찬 동문(의학.94)은 중학교 때부터 의사를 꿈꿨다. 처음엔 단순히 그 ‘가운’과 ‘진료 모습’이 멋져 동경했다. 의대생의 생활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사랑이 꽃 피는 나무’도 한 몫 했다. 학창시절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던 조 동문은 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의대에선 평범했지만 사람을 좋아했어요. 과대표, 배구 동아리 회장도 했었고 천주교 교리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거든요. 의학을 배우는 것도,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죠.”
졸업을 한 후에는 여느 의사와 다를 바 없었다. 신경외과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를 거쳐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이후 전문의 다음 과정인 펠로우십까지 밟았다. “처음에는 의사라는 직업이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었어요. 인턴 때까지는 배우는 것 자체에 심취해서 힘들다는 생각도 못했고요. 그런데 레지던트 과정에 들어서면서 힘들었죠. 그 땐 1년 365일 중에 128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병원에 있었어요. 당직일수가 월, 화, 수, 목, 금, 일 이었으니까요. 하루에 두 시간 이상은 잘 수가 없었고, ‘도저히 못살겠다’는 생각을 한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의사가 싫어졌던 건 아니에요. 힘든 기간을 지나고 나서는 의사라는 직업이 스스로도 정말 멋있고 보람도 있었죠.”
“진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의사가 천직인 줄만 알았던 조 동문. 그가 처음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군의관 복무 때다. “의사로 한창 바쁘다가 군대에 갔어요. 군의관이다 보니 훈련기간이 아니거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이 별로 없었어요. 사실 갑자기 찾아온 자유가 당황스럽기도 했죠. ‘나는 늘 바빴는데 지금 뭘 해야 하나’ 싶고.” 처음엔 그냥 시간을 보냈다. 그것도 한 달이었다. 지루해졌다.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신문 하나를 정독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4시간 정도. 그렇게 신문을 읽으면 하루가 지나갔다. 어느새 중요한 일상이 됐다.
그러던 중 유럽여행길에 올랐다.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아르바이트와 과외로 늘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행에서 자신이 그림을 좋아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미술관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그 그림을 그렸을 화가와 상황을 생각하는 게 재미 있더라고요. 나는 왜 이걸 몰랐을까, 생각해봤더니 그림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행복’에 대한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던 거죠. 바라던 의대에 왔으니 의사로 성공하는 게 전부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군의관 때 여러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진짜 행복은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런 그의 눈에 ‘의학전문기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창시절 여러 번 백일장에 입상할 정도로 글을 잘 썼고 기자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여러 방송사에 문의를 해봤지만 뽑을 예정이 없다는 답만이 돌아왔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의사로 활동하던 도중, SBS 의학전문기자 공고문을 보게 됐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후회는 있지만…”
남들보다 늦은 시작이었다. 기자를 시작할 때 그의 나이 34살. 의사가 되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있어 더 힘들었다. “주위에서 다 반대했어요. 아내도, 친구도, 부모님도. 이제까지 쌓아온 노력과 금전적인 부분이 가장 걸렸죠. 그런데 ‘내가 가진 것을 30대에도 버릴 수 없다면 내 인생은 거기까지다’ 라고 생각했어요. 한번 사는 인생 가진 것을 버릴 줄도 알면서 가볍게 살고 싶었죠.” 그럼에도 후회는 있다. “사실 머리를 쓰는 건 기자가 더 힘들어요. 의사는 해결책이 있는 지식을 외우고 연구해서 환자한테 적용하는 직업이거든요. 그런데 기자는 어떻게 취재해서 어떻게 보도할 지를 스스로 찾아야 해요. 특히 이해관계가 얽힌 사건을 보도하다 보면 정말 힘들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 비타민C가 항암효과가 있다는 이유로 암 환자들에게 많이 팔렸는데 실제로는 그런 효과가 없다는 걸 알아냈어요. 그걸 보도하면 비타민을 파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기 때문에, 고민이 많아지죠.”
의사에서 기자가 된 조 동문은 세상을 의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의사가 하는 일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예를 들어 예방의학과는 환자가 되기 전에 그 질병을 예방하는 연구를 해요. 사회를 의사의 시각으로 보면서 사회의 병들을 진단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해요. 실제로 의사 경험은 도움이 많이 되죠. 의사가 아니라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니 의사와 환자 모두를 보게 됐어요. 그 두 사이에서 생기는 빈틈으로 많은 환자들이 어려움을 겪는데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이 빈틈은 직접 겪어 본 사람이 아니면 발견하기 힘들죠.”
기자와 의학전문기자는 달라야 한다
조 동문은 “‘기자’와 ‘의학전문기자’는 달라야 한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더 전문성이 있는 만큼 이를 살려야 한다는 것. “한 언론사에서 내시경 검사 관련 보도를 했어요. 검사 기구 관리의 열악함과 비양심적인 병원에 대한 내용이었죠. 그런데 여기에는 이면이 있었어요. 검사 원가가 2만4000원인데 보험공단에서 8300원만 받으라고 한 거에요. 열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건 보도하지 않은 거죠. 또 저는 가습기 세척제로 임산부들이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특종상을 받았어요. 당시 언론에서는 ‘사망의 원인을 알 수 없다, 단순한 간질성 폐렴’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간질성 폐렴이 아닌 것 같아 취재해보니 신종 폐질환이었어요. 다들 아니라는 걸로 석 달을 우겼죠. 그제서야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를 통해 가습기 세척제가 원인이라는 걸 밝혀냈어요. 의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처음에 문제점을 발견하기 어려웠을지도 몰라요.”
의학전문기자는 건강과 관련된 모든 사회현상을 취재한다. ‘등록금으로 인한 대학생들의 자살 시 정신상태는 질병으로 따졌을 때 어느 정도 수준인가’를 묻는다. 출산 전 산모들이 태아의 다운증후군 검사를 하는데 이 아이를 낙태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실제로 10명중 8명이 등록되지 않은 곳에서 낙태를 하는데, 과연 이 경우 낙태를 불법화하는 것이 올바른 법인가에 대한 질문도 한다. 의사가 아니라 ‘의학전문기자’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나는 아직도 의사다
2010년 아이티 지진 당시, 조 동문은 취재를 위해 파견됐다. 하지만 그는 아이티에서 취재뿐만 아니라 의사로서 진료하기도 했다. “사실 자원해서 간 건 아니에요. 처음엔 두려웠죠. 그런데 그 때 배운 게 한가지 있어요. 봉사는 내세울만한 일이 아니라는 거에요. 봉사를 한다는 건 내가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지 그들이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은 건 아니거든요.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취재뿐만 아니라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올 수 있었습니다.”
조 동문은 기자가 의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는 직업이라는 것. “저 사람은 왜 아프지? 어떻게 하면 나을까? 라는 생각에서 시작해요. 사회현상도 마찬가지로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어떻게 해야 나아질까? 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저는 제가 아직도 의사라고 생각해요. 치료하는 대상이 환자가 아니라 사회일 뿐 본질적인 것은 같아요.” 의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의사의 다른 길을 찾았다는 조 동문. 그의 취재는 세상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학력 및 약력
조동찬 동문(의학.94)은 1994년 우리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해 2000년 졸업했다. 이후 신경외과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를 거쳐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펠로우 과정까지 의사로 활동했다. 2008년에는 SBS 의학전문기자로 입사해 현재까지 의학전문지식을 다루는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10년에는 아이티 지진 취재에서 의료활동을 하는 등 본래 의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올해에는 제 7회 건양의학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권요진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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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