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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 뛰어든 히포크라테스
조회 2397 2016-02-17 10:09:15

 


 

 

'근골격계질환'을 아십니까?
근골격계 질환은 단순반복작업이나 무리한 작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체적 질환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질환은 지난 1995년 한국통신 114 안내원들이 근골격계질환의 일종인 경견완장애로 산재인정을 받으면서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근골격계질환'은 내가 남들보다 몸이 약해서 생기는 '당연한 병'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997년 IMF 한파는 '생산성 향상'이라는 미명 아래 산업인력의 더욱 높은 노동강도를 강요했고, 노동자들은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IMF 시절이 끝났다고 회자되는 2003년 오늘, 이 땅의 산업역군들은 '근골격계질환'이라는 IMF 후유증을 온 몸으로 앓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서야 사회적 이슈가 된 근골격계질환을 일찍부터 주목하고 대책 마련에 앞장섰던 이가 있다. 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인 임상혁 동문(의학 91년졸)이 바로 그 주인공. 근골격계질환을 비롯한 각종 산재현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임상혁 소장. 두 개의 전문의 자격증과 공학박사 학위를 지닌 그이지만 풍족한 삶을 마다하고, 노동자와 함께 하는 힘겨운 여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자가 주인되는 원진녹색병원

 

그가 근무하고 있는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원진녹색병원 부설 연구소이다. 1999년 원진녹색병원의 탄생과 함께 한 임 동문은 자신의 근무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는 병원에 대해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병원"이라는 것과 병원의 탄생이 "보건운동 역사 속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이라는 것을 시종일관 강조한다.

"원진녹색병원은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만들어진 병원입니다. 86년 시작되어 92년 후반까지 이어진 세 차례의 투쟁과 병원설립을 위한 투쟁까지 10년여 투쟁의 결과물인 거죠. 노동자 5백여명에 대한 보상금으로 원진녹색병원은 설립됐고, 노동자가 주인인 최초의 병원입니다."

 

이러한 배경은 자연스럽게 병원의 주인이 노동자라는 것, 그리고 노동자를 위한 병원이라는 의미를 갖게 했다. 실제로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건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녹색병원은 대다수 병원들이 파업했던 의료분쟁 속에서 의료계의 정상진료를 실시해 자신들의 말이 공허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또한 지금도 단식투쟁이나 힘겨운 노동자들의 투쟁이 진행되는 곳에서 마다 의료봉사를 나온 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연구와 진료는 의료원 아닌 현장에서

 

임 동문은 2년 전 연구소 내에 근골격계질환센터를 만들었다. IMF 이후 요구되는 노동량과 노동강도를 생각한다면 근골격계질환문제가 당연히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센터가 노동자들을 자극해서일까, 아님 노동자들이 센터의 도움을 받아서일까. 최근 각 사업장에서는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노동자들의 집단요양 신청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2001년 울산 현대정공의 근골격계질환 노동자 71명이 집단으로 산재요양 신청 후 지금까지 근골격계 직업병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곳은 대우조선을 포함한 20여 곳. 이러한 사업장의 일선에는 언제나 임상혁 동문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연구는 결코 연구소에 앉아서 진행되지 않는다. 그가 연구하는 곳은 부당한 노동환경을 가진 사업장이고, 그의 연구대상은 현장의 노동자들이다. 아직까지도 직업병은 사용자측이 쉽게 인정하지 않는 산재이다. 때문에 문제가 생긴 현장에서 자료를 모으고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다.

'더딘 죽음'을 방치하지 말라

 

그는 노동자의 건강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노동자 스스로가 인식하는 것'이라 말한다. 지금까지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의 건강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노동자의 건강문제는 지금까지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제대로 취급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서야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 운동 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미비한 실정입니다. 다치고 죽어야만 산재가 아닙니다. 서서히 몸이 죽어가는 환경을 알고도 방치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입니다."

 

그는 '노동환경의 문제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노동자들이고 해결방안을 알고 있는 것도 그들'이라고 말한다. 즉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과거 노동자의 건강문제는 외부에서 전문가들이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에 앞장서는 문제로 인식되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고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 임 동문의 확고한 신념이다.

산재는 '노사' 아닌 '노사정'의 문제

 

임 소장은 산재문제를 노사문제로 한정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산재 발생을 최소화하는 작업환경을 법적으로 규정해 관리하고 있으며 사후 보상에 있어서도 산재보험을 통해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국내의 노동 환경은 산재가 아직도 '노사갈등 차원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아가 임 동문은 국가의 법적 조치와 함께, 사업주의 도덕성을 강조한다. '아무리 사회 안전망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사업주의 의지가 없으면 산재가 줄어들 수 있는 환경은 어렵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회사측의 배려와 함께 노동자나 노조가 참여하는 시스템을 강조한다. 산재를 근본적으로 예방하는 것에 중점을 둬야지 산재에 따른 보상은 미봉책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국가의 제도와 사측의 성의,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3박자를 이룰 때 비로소 산재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선진국의 많은 사례들이 잘 뒷받침하고 있다.

기술인 아닌 의료인이 되라

 

원진레이온 투쟁에 영향을 받아 노동자와 함께 하는 길을 선택한지 이제 10여 년. 동료의사들이 의료계에서 안정된 자리를 잡아나갈 나이에 그는 노동계의 거친 현장에 자리를 잡았다. 돈과 명예에 대한 꿈을 접고,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살아온 삶이 이루어낸 성과라면 성과다. 그런 그가 후배들을 위해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 번째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체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별다른 목표 없이 사람들 속에 묻혀 살지 말고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삶의 주인이 되라는 말이죠. 두 번째는 의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데, 기술인이 아닌 의료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돈과 명예를 위한 기술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정도면 충분합니다. 앞으로 졸업할 후배들은 물질과 명예를 추구하는 기술인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의료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는 앞으로의 소망에 대해 '지금의 연구소를 산재와 관련한 최고의 연구기관으로 만드는 것'이라 고백한다. 노동계에서는 최고로 인정을 받지만 전반적인 사회와 의료계에서는 아직까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임 동문의 불만이다. 모든 준비는 갖추어져 있는데, 함께 만들어갈 후배들이 부족하다며 임 동문은 허허로운 웃음을 짓는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의과대학 정원 축소 방침을 상기하며 '후배가 부족하다'는 그의 말이 소태처럼 씁쓸하게만 들린다.

 

 



 

박용일 학생기자 jajunation@ihanyang.ac.kr
사진 : 이재룡 학생기자 ikikata@ihanyang.ac.kr


학력 및 약력

임상혁 동문은 1991년 본교 의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병원에서 1994년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획득했고, 1999년 산업의학 전문의가 되었다. 올해 홍익대학교에서 인간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임 동문은 1999년 원진녹색병원 개원과 함께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을 시작해 현재 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다. 임 동문은 노동건강연대 대표, 산재보험 공동대책위 위원과 같은 시민단체 활동에서부터 노동부 산하 직업병 심의위원회 위원과 산재보험 심사위원회 위원직까지 산업재해와 관련된 다수의 활동들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03-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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